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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카구치 토모 ‘바냐 아저씨’ (p250~p254)

 

일본인 연출가 쯔카구치 토모는 러시아 19세기 바냐를 2016년 식탁으로 데리고 온다. 테이블에 바냐와 사람들이 줄줄이 앉아 있다. 그들 앞으로 화려한 코스 요리가 연달아 등장한다. 극이 끝날 때까지 이들은 지옥 같은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식사가 끝난 뒤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김세운 :  

  원작의 인물들을 레스토랑 느낌이 나는 테이블로 데려왔다.

토모 :

  원래 바냐도 쏘냐도 오래된 시골집에서 다 갇혀 있다. 바깥세상을 꿈꾸면서도 거기서 자기 인생을 두더지처럼 보내버리고 살아왔던 거다. 인간관계가 어떤 발전도 어떤 새로움도 없는 상태다. 그것을 오래된 레스토랑에서 격식만 있는 테이블과 식사를 통해서 그 사람들의 답답함을 보여줄 수 있는게 아닐까 생각 했다. 그런 콘셉트였다.

 

김세운 :  

  마리나랑 찔레긴을 제외한 인물들은 테이블을 벗어나지 못한다.

토모 :

  코스 요리 먹을 때 여섯 명은 마음대로 빠져 나갈 수 없다. 이걸 지키면서 가면 이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욕을 하고 있더라도 누군가가 자기 아내를 꼬시고 있더라도 체면적으로는 모르는 척 하고 안 듣는 척 한다. 어쩔 땐 자기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무시한다. 체홉이 쓴 등장인물의 관계도 바로 그런 관계가 아니었을까. 어떤 집안에 갇혀 있는 가족들 이야기다. 거기서 엄마는 사위를 좋아하고 아들은 사위의 아내를 좋아한다. 쏘냐는 의사를 좋아하고 의사는 옐레나를 좋아한다. 이런 관계가 탈출구 없는 사람들의 답답함, 아무도 거기서 못 빠지기 때문에 생긴 이야기가 아닐까. 그게 본질이 아닐까 싶었다. 등 퇴장이 없다는 프레임 자체는 저의 오리지널이 아니다. 연출가인 루크 퍼시발이 만든 바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김세운 :  

  바냐가 총을 쏘는 장면보다 테이블을 뒤집어 버리는 게 더 충격이었다.

토모 :

  그것은 자기가 묶여 있는, 자기가 지배당하고 있는 집안 혹은 사회의 규칙이나 법칙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반(反)함이다. 이 테이블을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맨날 지키고 식사를 해야 한다. 한 시간 동안 그 규칙이 관객도 배우도 익숙해진 프레임이 된다. 근데 그것을 바냐가 뒤집는다. 그리고 총싸움을 하고 나서 나타나는 부분들은 테이블 없이 가기로 했다. 거기엔 규칙이 없는, 뭔가 무너져 버린 세계다. 근데 그 세계가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겪긴 했지만 나머지 삶은 계속 된다는 것이다. 이미 테이블은 없고 식사는 안 나오고 규칙이나 자기가 믿었던 프레임이나 구조 같은 게 무너져 버리고 나서도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런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김세운 :  

   프레임의 붕괴. 보는 사람마다 그 장면은 다르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토모 :

   어떤 이미지를 동행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한국 사람이 보면 그게 IMF처럼 보일 수도 있고 더 나이 많은 사람이 보기엔 6.25전쟁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요즘이라면 세월호 사태일 수도 있다.

 

김세운 :  

  유모나 집사는 계속 먹을 접시를 날라주고 접시를 치우길 반복한다.

그들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 달라.

토모 :

  식사 자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기 위해 진행을 시켜줘야 하고, 진행상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해 줘야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소비하는 바냐, 마리야, 교수님 등 손님들을 그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냐고 한다면 아니라는 것이다. 돈이나 주문으로 무엇을 시킨다고 하면 지배한다고 하겠는데 마리나 같은 경우 음식이 접시에 남아있든 상관없이 강제로 가져가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찔레긴도 더 식욕이 있든 없든 간에 새로운 접시를 가져온다. 이것은 시스템의 관리자, 시스템의 집행자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이 사람은 인간적인 사람으로서의 감정보다는 어쩌면 기계적이고, 자기 일과 시스템의 논리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김세운 :  

  한바탕 소동이 끝난다. 마지막에 불을 켰다가 껐다가 다시 어떻게든 산다. 답답하기도 하고 불편하게 만든 장면 중 하나였다.

 토모 :

  제가 일본인인데 한국에 살지 않나. 한국을 2000년도부터 봤는데 요즘엔 느끼는 것이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와 박근혜 정권 이후에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과 답답함이었다. 바깥으로 못나가는 폐쇄성이랄까. 바냐를 처음 생각했을 때 세월호 이전엔 기본적인 테이블을 가지고 식사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마지막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사람들이 “한국에서 못살겠다. 빨리 이민을 가야겠다.”, “자식만이라도 보내야겠다.”라는 말을 하는 모습을 정말 많이 봤다. 근데 아무도 안 가더라. 계속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때 바냐의 마지막 부분이 딱 연결 됐다.

 

김세운 :  

  남는 자와 떠나는 사람들. 이들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

토모 :

  각자 다른 방향으로 헤어지는데 사실은 한국의 지금 상황처럼 아무도 어디 갈 데가 없다. 이민 간다고 해서 이민 가서 거기서 행복한 삶이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또 여기 남아서 살았다고 해서 밝은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갈 데가 없다. 교수가 “자 우리는 떠납시다!”라고 인사하고 떠나려고 하는데 떠나는 사람도 갈 데가 없다. 어디가 더 절망적일까. 남은 사람도 갈 데가 없고 그런 상황으로 그려져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안하고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는 자기 전등을 켜고 떠나고 그래야 하는데 어디도 못 간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고 자기 퇴장의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김세운 :  

  체홉은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토모 :

  의사들이 사람의 아픈 부분을 딱 집어내지 않나. 그것처럼 체홉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통, 꿈, 이상, 욕망 같은 것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또한 의사가 그러는 것처럼 사람이 죽든 살든 거기에 과도하게 들어가지 않는다. 환자와 환자의 질병에 거리감을 갖는다는 소리다. 체홉도 그 사람의 본질에 어떤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캐치’해 냈다. 즉 그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동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행복하든 절망하든 자살을 하도록 하지 않았다. ‘세 자매’ 마샤의 완성 대본이 아닌 전 단계에선 베르쉬닌이랑 헤어졌을 때 자살을 시도했다는 대사가 있었다고 한다. 근데 체홉은 그 사람에게 자살이라는 행동을 못하게 했다고 한다. 행복하게 됐든, 불행하게 됐든 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삶이다. 또한 체홉은 ‘드라이’하다. 제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드라이함은 체홉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에선 드라이한 체홉의 모습이 사라질 때가 많다. 멜로 드라마가 될 경우가 많다. 아픔, 고통, 그런 것만 확대되는 경우도 있다. 체홉은 웃어도 되고, 비웃음도 되고, 진짜 코믹한 인생에서 쇼를 했구나, 그렇게 냉정한 시선으로 봐도 되는 것들을 다 포함해서 그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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