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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Wie der Soldat

das Grammofon repariert

2018 12.24~31

 

KOCCA콘텐츠문화광장

스테이지66

Photo by 보통현상 김솔

 

* 일부 사진은 권애진 찍음

세상에는 “올바른 이름” 과 “올바르지 않는 이름” 이 있는가봐.

      알렉산다르, 네 이름은 올바른 이름…

          아시야, 내 이름은 잘못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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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라고 일컬어지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정면에서 다룬 작품으로, 전쟁 전야와 전시, 전후에 걸쳐 진행된다, 냉전시대가 종지부를 찍고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보이던 20세기 중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진흙탕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분쟁에서 ‘민족청소’라는 명분으로 각지에서 강간, 학살이 자행되고 수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희생당한다. 20세기 현대에 이런 일이 유럽에서 발생했었다는 사실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낯설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설에서 바다 건너 먼 나라 이야기로 외면해버릴 수 없는 어떤 절실함을 발견했다. 소설은 400페이지를 넘는 방대한 양 이지만 연극화함에 있어서 연출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압축 각색 작업을 수행하였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보스니아 내전

 

           이야기는 내전 발발 전야의 보스니아 지방도시 비세그라드에 살고 있는 한 소년의 시선을 통하여 그려진다. 소년의 평화로운 유년은 점차 그 빛을 잃고, 그 시대는 전쟁으로 천천히 어그러져간다. 갑작스러운 숙부의 군 입대, 조부의 죽음, 학교에서의 고립 등 일면 평범해 보이는 소년의 일상을 그리면서 삶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가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보스니아 내전을 그려냄에 있어서 소년의 시선을 선택한 것은 효과적이었다. 그로 인하여 참혹한 전쟁장면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도 전쟁이 일상을 어떻게 파괴 해 가는지 사실적이지만 엉뚱하면서 재치 있게 그려낼 수 있었다. 또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 못하는 어린 아이의 소박한 의문을 통하여 전쟁이라는 부조리가 더욱 부각되었다. 각 민족이 섞여 생활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는 외견으로는 인종의 판별이 어려워 이름으로 이슬람 계와 세르비아 계를 이름으로 구분하여 대학살을 자행했다. ‘민족청소’라는 불의한 사건 앞에 소년은 ‘올바른 이름’과 ‘올바르지 않는 이름’ 이 있다고 믿어버리고 ‘올바른 이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약자이기 때문에 전쟁에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슬픈 오해가 전쟁의 현실과 그 부조리를 강조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몽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연극적 판타지

 

           할아버지는 손수 만든 ‘마법의 지팡이’를 선물하면서 소년의 문학적 재능이 그가 속한 사회의 축복이 될 것이라 예언하고 세상을 떠난다. 할아버지가 말한 마법의 권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현실에서 강력한 의미와 상징을 발견하고 인간이 다시 능동적으로 살아가게끔 시선을 제안하는 ‘예술의 지팡이’는 아니었을까.

           티토와 소년의 할아버지 역은 한 배우가 일인이역으로 수행하여 은유적 관계가 발생하도록 했다. 주인공의 평온한 유년기는 ‘조부의 죽음’에 의해 종언을 고한다. 이는 티토의 죽음에 의해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분열, 붕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중첩된다.

           티토의 초상화가 걸려있던 벽의 하얀 자국은 마치 신의 빛나는 섭리 혹은 예언, 예술가가 영감을 받는 순간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것은 소년의 과도한 상상력에 의한 망상에 불과하지만…. ‘연극’이라는 장치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것도 보는 이의 상상력의 도움을 빌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판타지를 만들어내곤 한다. 연극적 재미다.

           다시 현실 속 교실로 돌아와 결국 소년은 선생님으로부터 수업 중 딴 짓을 한 대가로 심한 꾸지람을 듣는다. 이렇게 연극적 판타지는 마치 마법과도 같아서 그 망상을 무대 위에 현실화하기도 하고 현실과 망상을 동시에 올려놓는 것도 가능하다. 원작의 지니는 마법적 리얼리즘, 요설적 판타지는 무대 위에서 연극적 상상력으로 구현되어 관객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할 것이다. 이와 함께 독해의 지적 흥분도 같이 따라가기를....

 

극중극, 소설 속 이야기와 현실 사이의 간극,

허구와 진실

 

           연극의 전반부는 전쟁 발발 전의 폭풍전야부터 전쟁까지 주인공 소년이 쓴 일기형식으로 전개된다. 후반부는 내전 종료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작가가 된 주인공이 쓴 단편소설 속 이야기(허구)와 성인이 된 주인공이 보스니아를 방문하여 벌어지는 이야기가 교차편집 된다. 소년의 시점으로 그려진 ‘일기’의 세계가 좀 더 구어체에 가까운, 소년 특유의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이야기의 세계였다면, 후반부는 작가가 된 주인공의 성숙한 문학적 풍취가 느껴지는 어른의 현실 세계다. 그러나 문학의 세계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인식이 개입해 들어오면서 ‘환상=마법의 힘’에 대한 믿음은 퇴색해버린다. 후반부에서 현실의 전장에서 학살을 담당했던 숙부는 주인공의 안이한 낙관주의를 조롱한다. “나도 그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 있어. 그런데 결국 포로는 전부 총으로 쏴 죽여 버렸을 걸? 하지만 그 사실은 공표되지 않았어.” 전쟁과 학살의 압도적인 사실에 직면한 순간 문학과 드라마, 즉 예술이 지닌 휴머니즘은 가차 없이 붕괴되어 버린다.

 

           후반부의 테마는 첨예하고 쓰다. 주인공이 지닌 ‘마법의 힘’이란 창조하는 힘이다. 즉 이야기를 풀어내는 문학과 연극의 힘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법’은 보스니아에서 전쟁의 상흔을 목격하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퇴색하여 그 효력을 상실해버리고 만다. 여기에는 우리 연극인이 직면하고 있는 어떤 고통스러운 인식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연극이 과연 이 참담한 현실을 넘어 설 수 있는가? 이미 주어져버린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연극적 상상력과 휴머니즘은 관객에게 어느 정도의 효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연극인에게 어떤 본질적인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살아남은 우리 모두에게 남아버린 상처,

떠난 자, 그리고 남은 자 사이에 서다.

 

           이 작품에는 알렉산다르와 에딘이라는 두 명의 소년이 등장한다. 알렉산다르는 세르비아계 아버지와 무슬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내전이 가속화되면서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소년은 고향을 떠나기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축복대로 소설가로 성장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소년 에딘, 불륜으로 깨져버린 가정을 등지고 새로운 자신을 찾아 길을 떠났던 소년의 아버지는 전쟁의 포화를 뚫고 새 아내를 데리고 아들이 있는 전장으로 돌아온다.

           이 두 가족의 이야기는 마치 리어왕과 글로스터의 가족처럼 작품 속에서 대비되면서 극적인 긴장과 의미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알렉산다르는 버리고 떠났다는 부채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갈 것이고 남은 이는 온 몸을 훑고 지나간 전쟁의 상흔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들의 유년은 망가져버렸고, 성인이 된 그들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만다. 그 강을 건너는 것은 어쩌면 그들만의 숙제가 아닌 것 같다. 여기 우리 사이로 흐르는 것도 그것과 같음이다.                                    손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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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규 

김경일 

김보경 

김수정 

김평조 

김희정 

라슬기

문지홍 

박철웅 

박철현 

서정식  

서제광 

송철호 

장용철

전정훈 

조 은 

홍진일 

KOCCA콘텐츠문화광장

스테이지66

2018 12.24~31

원작    Saša Stanišić 

각색・연출 쯔카구치 토모 

조명디자인    이경은 

무대디자인    Shine-Od

영상디자인    김성철 

음향디자인    길선희

부음향디자인    류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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