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안톤 체홉 해설서 > 

바냐 아저씨

 

 


 

일본인이지만 한국 연극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쯔카구치 토모 연출가는 19세기 러시아 바냐를 자본주의 시대로 데리고 온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배출하는 행위가 시끌벅적하게 발생했다가 허무하게 휘발 돼 버리는 ‘식탁’우로 바냐의 인물들을 소환한다. 회화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키는 듯한 긴 식탁에 일렬로 앉은 배우들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식탁을 벗어날 수 없다. 식탁 위엔 화려한 코스 요리가 끊임없이 등퇴장을 반복한다. 음식을 끝까지 먹어야 하는 바냐와 인물들은 소비의 굴레에 자・타의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곤욕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잘근 잘근 씹고 삼켜서 허무하게 사라지는 음식처럼, 식탁 위에 쏟아지는 이들의 푸념, 회고, 욕설, 뒷담화, 욕망, 사랑 고백 등도 등장했다가 헛되이 사라지길 반복한다. 소비의 굴레 앞에서 의미가 있는 것들이든, 없는 것들이든 무의미와 상실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결국 식탁은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어 보이지만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의 공간이다. 바냐와 남은 인물들은 교수와 옐레나가 떠난 뒤 답답하고 허무한 공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살아간다. (P 23)

 

 

쯔카구치 토모 연출가의 연극 ‘바냐 아저씨’에서 우울함과 상실감을 드러내 주는 장치는 음식이다. 음식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다. 특별하다. 왜냐하면 ‘바냐 삼촌’의 원래 부제목 ‘4막으로 이뤄진 시골생활의 장면들’과 완전히 대비되기 때문이다. 농촌마을에서 볼 법한 감자나 채소가 아니라 고급 레스토랑에서 볼 수 있을 ‘코스요리’들이 상연 시간 내내 등장한다. 에피타이저, 스프, 메인요리, 고급스러운 와인, 과일까지 끊임없이 말이다.

쯔카구치 토모의 음식은 19세기 러시아를 벗어나 21세기 자본주의와 소비의 굴레를 상징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소비로 대변되는 음식들의 행렬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해프닝이자 난장을 보여주는 셈이다.

먹는 행위는 우울을 드러내주고, 우울을 증폭시켜주는 아주 훌륭한 기재로 작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먹는 행위 자체가 무언가를 씹고 삼키며 끊임없이 없애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때론 입을 통한 토사물과 아랫도리를 통한 배변으로 배출되며 끊임없이 의미 없음과 혐오스러움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소비를 하고, 허탈함에 젖어 있으며, 다시 음식을 소비하고, 다시 허무로 빠져드는 무한궤도 속에 놓여 있다. 소비와 우울의 연쇄 반응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옥 같은 굴레에 갇힌 등장인물들을 관객들은 지켜봐야 한다.

쯔카구치 토모의 ‘바냐 아저씨’에서는 이 과정이 한 인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고 있는 전 인물에게 일어난다는 점에서 묘미가 있다. 일렬로 된 긴 테이블에서 씹고 뜯고 마시고 배출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고 그 과정 속에서 바냐의 푸념, 뒷담화가 드러난다. 또 연신 지루하고 따분해 하는 옐레나의 불평도 드러난다. 의사 아스뜨로프를 짝사랑하는 쏘냐의 절절한 마음이 드러나기도 하고, 늙음을 한탄하는 세례브랴꼬프의 한탄도 드러난다. 자연을 사랑하는 아스뜨로프의 의지도 만날 수 있다.

허무와 소비를 상징하는 테이블에서 바냐의 푸념은 자주 등장한다. 교수가 땅을 매각하자고 제안할 때 바냐는 말한다. “25년이야,25년……지난 25년 동안 이 영지를 관리하고 악착같이 일해서 매달 당신한테 돈을 보냈어. 그런데 당신이란 인간은 그 동안 단 한번도 나한테 고맙다고 말한 적이 없어. 당신이 준 건 일 년에 오백 루블이라는 푼돈 밖에 없어. 그것도 25년 동안 단 한 번도, 한 푼도 올려주려고 한 적이 없었어!”

푼돈을 받고 일했다는 사실을 바냐가 언급하고 있지만 바냐를 슬프게 하는 것은 흘러가버린 자신의 청춘이다. 바냐 마음속에 갇혀 있던 뜨거운 언급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하지만 묵직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그의 말 역시 섭취되는 음식과 함께 소비돼 버린다.

결국 더욱 화난 바냐는 끊임없이 생산과 소비를 반복하는 자본주의 상징 ‘식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다. 바냐의 행동은 교수를 향한 분노 표출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무한대로 반복되는 소비 메커니즘을 향한 반항과 전복이다.

바냐가 식탁을 뒤엎는 순간 옐레나는 자신의 음식을 재빠르게 챙긴 뒤 안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기 접시를 구한 아스뜨로프는 무대 왼편에서 닭다리를 뜯느라 정신이 없다. 바냐의 분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소비의 메커니즘은 옐레나와 아스뜨로프로 대변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바냐의 발버둥이 소비라는 굴레에 또다시 먹힌다. 코미디다.

뿐만 아니라 식탁이 엎어진 뒤 깔깔거리며 등장하여 접시와 식기 도구를 정비하는 하녀 마리나의 모습은 추후에도 이 소비 메커니즘이 반복될 것이라는 어떤 불길한 암시를 준다. 마리나가 청소를 한 뒤, 바냐는 총을 들고 교수를 겨냥하지만 실패한다. ( p 26~)

(김세운 )

bottom of page